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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5-03-02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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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파극만이 연극의 전부였던 1920년대에 그의 희곡은 우리나라 언어로 쓴 최초의 근대극이며 명실공히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극작가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라고 고려대 국문과 서연호(徐淵昊)교수는 김우진의 최후 작품『산돼지』(3막희곡)를 이렇게 평가했다.
김우진의 문학적 근대성은 그의 시(詩)보다는 산문(散文)에서 더욱 첨예하게 나타나고 있다.
1922년 3월 15일의 일기에는 「새로운 진실한 예술은 인생의 전국(全局)으로 서의 예술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갈파했는데 그의 예술관을 요약하는 대목으로 당시 한국문단을 주름잡던 이광수류 문학의 허구성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생의 절실한 체험을 구체성과 개별성에 입각해서 기술하게 될 때 문학이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또 한시대의 문학과 국민과의 관계를 규명하면서 ①「문법을 통일하고」② 「언어사전을 정비하며」③「민족문학의 유산인 구전문학(구전문학)을 채집하여 문자로 정착시킴으로써 후세의 문학토양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르별로 보는 그의 문학
·희곡분야는 그의 문학적 근대성을 작품으로써 가장 성공적으로 형상화한 장르라고 할 수 있다. 「正午」「이영녀(李永女)」「두더지시인의 환멸」「난파(難破)」「산돼지」가 창작희곡이고 번역작품으로 「위렌부인의 직업」이 남아있다. 특히 「이영녀(李永女)」는 3막짜리 극으로 목포 유달산 밑 사창가의 처참한 생활을 자연주의 수법으로 그린 작품이며 「난파」와 「산돼지」는 1926년에 쓴 우리나라 문예 사상 최초의 표현주의 희곡으로서 신파극만 존재하던 시대에 실로 전위적 실험극이었다. 「난파」는 복잡하게 얽힌 유교적 가족구조 속에서 현대적인 서구윤리를 지닌 한 젊은 시인의 몰락하는 과정을, 그리고 「산돼지」는 좌절당한 젊은이의 고뇌와 방황하는 모습과 함께 그의 사상인 사회개혁을 역설하고 있다. 그의 이 작품을 친구에게 편지로 소개하면서 「이 작품은 조선청년의 생명력을 추상해 본 것」이라고 고백했듯이 개화 지식인의 임상보고서적 내용을 담고 있다.
·평론분야는 김우진이 이론으로써 가장 탄탄한 근대성을 과시했던 분야다. 그 중에서「소위 근대극에 대하여」「자유극장이야기」「사옹(沙翁)의 생활」「구미(歐美)」극작가론은 탁월한 논문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창작을 권합네다」라는 글에서 표현주의를 체계적으로 소개했으며, 전통적인 인습타파를 작품주제로 삼은 한국작가들에게는 표현주의가 가장 알맞은 창잡법이라는 논지를 폈다.
그는 대단히 진실적인 문학관을 가지고 있어서 「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하라」「아관(我觀)계급문학(階級文學)과 비평가」라는 논문을 통해서 계몽적 민족주의와 인도주의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특히 「조선말 없는 조선문단에 일언(一言)함」에서는 순수한 조선어의 부흥과 개량을 역설했고 새문전(文典)의 제정과 사전(辭典)의 출현 구비전설과 민요, 동요의 수집을 촉구했고 우리의 독특한 시가율(詩歌律)을 가질 것과 외국문학의 우리말번역 신문잡지의 대중화 등을 주장했다.
그는 자기가 겪은 시대적 고통을 희곡 속에 적절히 투영함으로써 계몽적 민족주의나 인도주의 내지 감상주의에 머물렀던 기성문단을 훨씬 뛰어 넘은 선구적 극작가였으며 표현주의를 직접 작품으로 실험한 우리나라 유일의 극작가였다. 또한 해박한 식견과 선구적 비평안을 가지고 당대 연극계와 문단에 탁월한 이론을 제시한 평론가이며 우리나라 최초로 신극운동을 일으킨 연극운동가로 평가된다.
김우진의 문학적 근대성은 그의 시(詩)보다는 산문(散文)에서 더욱 첨예하게 나타나고 있다.
1922년 3월 15일의 일기에는 「새로운 진실한 예술은 인생의 전국(全局)으로 서의 예술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갈파했는데 그의 예술관을 요약하는 대목으로 당시 한국문단을 주름잡던 이광수류 문학의 허구성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생의 절실한 체험을 구체성과 개별성에 입각해서 기술하게 될 때 문학이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또 한시대의 문학과 국민과의 관계를 규명하면서 ①「문법을 통일하고」② 「언어사전을 정비하며」③「민족문학의 유산인 구전문학(구전문학)을 채집하여 문자로 정착시킴으로써 후세의 문학토양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르별로 보는 그의 문학
·희곡분야는 그의 문학적 근대성을 작품으로써 가장 성공적으로 형상화한 장르라고 할 수 있다. 「正午」「이영녀(李永女)」「두더지시인의 환멸」「난파(難破)」「산돼지」가 창작희곡이고 번역작품으로 「위렌부인의 직업」이 남아있다. 특히 「이영녀(李永女)」는 3막짜리 극으로 목포 유달산 밑 사창가의 처참한 생활을 자연주의 수법으로 그린 작품이며 「난파」와 「산돼지」는 1926년에 쓴 우리나라 문예 사상 최초의 표현주의 희곡으로서 신파극만 존재하던 시대에 실로 전위적 실험극이었다. 「난파」는 복잡하게 얽힌 유교적 가족구조 속에서 현대적인 서구윤리를 지닌 한 젊은 시인의 몰락하는 과정을, 그리고 「산돼지」는 좌절당한 젊은이의 고뇌와 방황하는 모습과 함께 그의 사상인 사회개혁을 역설하고 있다. 그의 이 작품을 친구에게 편지로 소개하면서 「이 작품은 조선청년의 생명력을 추상해 본 것」이라고 고백했듯이 개화 지식인의 임상보고서적 내용을 담고 있다.
·평론분야는 김우진이 이론으로써 가장 탄탄한 근대성을 과시했던 분야다. 그 중에서「소위 근대극에 대하여」「자유극장이야기」「사옹(沙翁)의 생활」「구미(歐美)」극작가론은 탁월한 논문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창작을 권합네다」라는 글에서 표현주의를 체계적으로 소개했으며, 전통적인 인습타파를 작품주제로 삼은 한국작가들에게는 표현주의가 가장 알맞은 창잡법이라는 논지를 폈다.
그는 대단히 진실적인 문학관을 가지고 있어서 「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하라」「아관(我觀)계급문학(階級文學)과 비평가」라는 논문을 통해서 계몽적 민족주의와 인도주의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특히 「조선말 없는 조선문단에 일언(一言)함」에서는 순수한 조선어의 부흥과 개량을 역설했고 새문전(文典)의 제정과 사전(辭典)의 출현 구비전설과 민요, 동요의 수집을 촉구했고 우리의 독특한 시가율(詩歌律)을 가질 것과 외국문학의 우리말번역 신문잡지의 대중화 등을 주장했다.
그는 자기가 겪은 시대적 고통을 희곡 속에 적절히 투영함으로써 계몽적 민족주의나 인도주의 내지 감상주의에 머물렀던 기성문단을 훨씬 뛰어 넘은 선구적 극작가였으며 표현주의를 직접 작품으로 실험한 우리나라 유일의 극작가였다. 또한 해박한 식견과 선구적 비평안을 가지고 당대 연극계와 문단에 탁월한 이론을 제시한 평론가이며 우리나라 최초로 신극운동을 일으킨 연극운동가로 평가된다.
1897∼1926. 8. 4
김우진은 1897년 안동 김씨의 후예인 목포의 갑부요 개화사상가이자 목포 개항 당시 무안 감리 (務安 監理)를 지낸 김성규(金星圭 1863-1936)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를 초성(焦星) 또는 수산 (水山)이라 하고 목포공립 보통학교(지금의 북교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8세에 일본 구마모또(態本)농업학교에 입학하였고 19세에 곡성(谷城)출신 정점효(鄭點孝)와 결혼하였으며 그후 1924년에 와세다대학(早稻田) 영문과를
김우진은 1897년 안동 김씨의 후예인 목포의 갑부요 개화사상가이자 목포 개항 당시 무안 감리 (務安 監理)를 지낸 김성규(金星圭 1863-1936)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를 초성(焦星) 또는 수산 (水山)이라 하고 목포공립 보통학교(지금의 북교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8세에 일본 구마모또(態本)농업학교에 입학하였고 19세에 곡성(谷城)출신 정점효(鄭點孝)와 결혼하였으며 그후 1924년에 와세다대학(早稻田) 영문과를